
제1장에서 부터 제2장까지 관류하는 이미지로서 천지의 성스러운 기운을 모은 삼족오(태양조)에 대한 부활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그림들에서 마음의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정지된 시간의 영원함을 느낄 수 있거나, 혹은 빈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적막한 길 위에서 부르는 자유와 평화를 찾아 나선 방랑자의 노래를 아련히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제이주의 한이 서린 라즈돌로예 간이역. 이제는 패쇄되어 텅빈 실내에 앉아 잠시 귀향 고려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젊은날 그들이 꿈꾸었을 희망과 이윽고 닥친 치명적인 좌절과 사무친 한을. 어떤 말로 그들에게 위로와 안타까운 심정을 전할 수 있을까요? “아! 운명은 너무도 많은 것을, 빼앗아 갔도다! 포도주가 가득 부어진 술잔을 다 비우지 못하고 인생의 연회를 일찌감치 떠나버린 자.”들이여.

우정마을에 가면 동북아 각국의 어린이들이 정답게 손잡고 있는 마을 벽화를 볼 수 있습니다. 어깨에 목총을 메고 병정놀이 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또래의 친구 얼굴들. 내 유년의 아스라한 기억들. 언제였을까? 비상하던 꿈의 날개를 잃고 사라진 동심. 오! 나비되어 훨훨. 평화로운 노래를 부르며 이곳에 찾아 오려무나...

최재형 선생이 살던 가옥은 마치 묘지처럼 고요했습니다. 선생이 이승을 떠나던 날. 안중근과 단지동맹 동지들의 영(靈)이 영전에 곡했으리라. 조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한민족의 존엄을 유린한 이토를 안중근은 선생이 마련하신 총으로 응징했습니다. 한 생명을 멸하였으나 만천하에 ‘평화’를 전한 의거는 선생의 뜻이였습니다. 삼가 영전에 꽃 대신에 ‘동양평화론’을 바치나니...

수이푼(솔빈) 강변에 가면 보입니다. 느낄 수 있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나간 한민족 150년 이주 역사의 슬픈 한을! 광야의 모진 칼바람을 한겹 보자기로 견디며 연해주로, 중앙아시아로, 각처에 잡초처럼 흩어져 살아온 방랑의 삶. 그 처절했던 생명을 보듬어 강물처럼 이어온 카레이스키 어머니. 그 어머니 품의 아늑한 평화와 지극한 사랑을...

고려인이 꿈엔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1937년의 라즈돌로예 역을. 비참했던 그때의 피맺힌 절규가 지금도 들리는 듯했습니다. 침목이 모두 관이 되어 고려인의 시신이 그곳에 뭍혀 있는 듯했습니다. 강제이주 당했던 고려인의 넋들이 그곳에 찾아 오리라. 그때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그 고난이 동북아의 평화공동체를 위한 희생으로 승화 되리니...

바이칼 알혼섬에 가면 그곳 담수호에 바다 물개가 살고 있습니다. 그 물개에 고려인의 모습이 투영됩니다. 고향을 잃어버리고 유랑하는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 그들은 왜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까? 그곳조차 정착할 수 없다면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합니까? 평화와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고려인 후예들. 아! 평화롭게 잠들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는 어디메뇨.

우수리스크 시민공원 한켠에 발해시대로 추정되는 돌거북이 초라하게 남아 있습니다. 태양을 숭배하며 그 덕을 닮고자 했던 밝달민족.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떨치던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면서 사라진 국조 삼족오(태양조). 오! 거북아 꿈꾸어라. 천년의 꿈을 이루어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할 삼족오로 부활하여라. 하늘로 다시 두 날개를 힘껏 펼치고 날아 올라라.

자작나무는 천손민족이 섬긴 신성한 나무입니다. 단군신화의 신단수, 단목도 자작나무 였다지요. 백두산을 경외하는 백의민족, 밝달민족은 흰(白) 빛을 사랑했습니다. 하얀 눈(雪)향기를 먹고 자랐나요? 고고히 기립한 수직의 정령! 순수로, 동심으로 인도하는 영혼입니다. 눈내린 겨울, 자작나무 숲을 걸어나온 백여우 한마리. 숲의 평화를 지키는 요정이라네.

우리말 ‘알’은 생명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어쩌면 알혼은 난생설화의 신라 알평과 어원이 동일한 것은 아닐까요? 알의 평화, 생명평화! 한민족의 시원이라는 샤먼의 성지 알혼섬. 그곳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세요. ‘나’ 는 사라지고 우주와 합일된 자아. 그 생명의 원천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천지여아동근,만물여아일체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딸찌 목조박물관에는 18세기 이 지역에서 브리야트 민족이 거주했던 가옥이 수몰지역에서 옮겨와 복원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청량한 공기를 호흡하며 가만히 귀 기울여 보세요. 바람결에 두런 두런 들려 오는 소리. 그곳 자작나무 숲과 집의 그림자 속에는 먼 옛날 앙가라 강가에 살던 마을 주민의 영혼이 아직도 그곳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시베리아의 끝없는 평원이 부르며 갈 길을 묻습니다. 그곳에 달려가 석양을 바라보리라. 별과 함께 잠들리라. 이른 새벽 자작나무 숲길을 홀로 걸어 보리라. 낯선 거리를 바람처럼 배회하리라. 오! 적막한 길위에서 뒤돌아 보는 방랑자여. 모든 경계를 넘어 자유와 평화를 찾아 먼 길 떠나온 고독한 존재여.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협소한 이단침대에 누워 연사흘 불편한 잠을 자고 일어나니, 문득 잠이 생명과 죽음을 잇는 교량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오염된 영혼을 투명하게 정제하는 정화조 기능을 하는 잠. 영혼은 그 잠의 교량을 자유로이 넘나들다 어느날 길이 막혀, 혹은 길을 잃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영혼을 소생시키는 평화의 잠을 주소서!

울란우데를 지나 새벽에 열차에서 맞이한 광대한 바이칼 호수를 바라보며, 아침식사 메뉴에 대한 욕망이 일어 났습니다. 오감(眼,耳,鼻,舌,身)을 축복하는, 안(바이칼 풍경), 이(꾀꼬리 소리), 비(튜울립 향기), 설(튜울립과 맑은 호수 물), 신(청량한 바람)으로 차려진 웰빙 식단을 준비해, 사랑의 꽃을 먹고 대자연의 원기를 취하고 싶은 거룩한 아침식사를 꿈꾸어 봅니다.

유리창에 투영된 실내와 투시된 창밖의 풍경, 그리고 그곳에 중첩된 심상과 그 너머의 세계. 운신의 폭이 좁은 답답한 쿠페(4인실)에서 모니터 구실을 하고 있는 유리창. 그 창밖에 전개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자를 바라보는, 역전된 시선 현상이 옵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유리창은 내면을 비추는 명경수(明鏡水).

창밖의 광활한 대자연을 바라보며, 푸시킨의 시 구절을 읖조립니다. “잘 있거라, 자유로운 대자연이여! 너는 마지막으로 내 앞에서, 푸른 파도를 일으키고, 오만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구나.” 연사흘 술잔에 가득 부어진 보드카를 비우며 비몽사몽! 모두 시인이 되어 자유와 대자연을 노래합니다. 몽상의 나래를 펴며 저 세상 밖으로 날아 갑니다.

어린 시절 꿈속에 자주 나타나던 백마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발랄라이카를 메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나겠다던 그 소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지바고, 라라, 파샤, 레닌, 파스테르나크, 그들은 그후 모두 어디로 떠났나? 바이칼이, 시베리아의 설원이, 대륙의 황량한 바람과 자작나무의 혼이 이제 백발이 된 나를 아직도 손짓하며 부르고 있습니다.

"천년을 잠들어 있던 소녀가 어느날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 묻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당신은 누구시지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또 어디로 가시나요?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아세요? 오, 말하지 말아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나는 막 당신의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장엄한 바이칼 호수에서 일몰을 보며 떠오른 몇해전의 이상한 꿈속 이야기 입니다.

바이칼 호수에는 여신 바이겔하탄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엔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쳤다지요. 그곳에도 ‘인당수’ 전설이 있고 ‘나뭇꾼과 선녀’의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심청이가 돌아왔나요, 선녀가 다시 내려왔나요? 호수위에 홀연히 여신이 나타나 춤을 춥니다. 해맑은 빛과 바람을 희롱하며. 오! 여신이여, 영원히 춤추어 다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알혼섬에는 영이 깃들만한 나뭇가지에 청, 홍, 백색의 천을 묶어 놓은 ‘잘라아’가 도처에 있습니다. 인간과 영계(靈界)를 잇는 메신저 샤먼. 너울 너울 장단에 맞쳐 춤추며 자연의 운기를 타고 초자연계로 비상한다지요. 어느 순간 탈혼망아의 상태에 이르고, 그 망아의 빈곳에 신이 내린다고 합니다. 춤은 나를 비우고 신을 영접하기 위한 접신행위 입니다.

알혼섬에서 텡그리는 하늘신을 뜻하는 최상의 신 이라고 합니다,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은 텡그리에서 왔으며 우주의 창조자이고 하늘의 정령이라고 합니다. 알혼의 비석에 “모든 인간의 아들은 텡그리의 결정에 의해 태어나고 죽는다” 라고 새겨져 있다 합니다. 불한바위에서 텡그리의 아바타르를 상상해 봅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구현할 이 시대의 ‘아바타’ 이기를...

이르쿠츠크의 즈나멘스키 수도원 안에는 무명의 데카브리스트와 예카쩨리나 부인의 묘가 있습니다. 1825년 12월,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가난한 자를 위한 가진 자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있었습니다. 그 혁명에 참여한 젊은 장교들을 데카브리스트 라고 하지요.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위해 기꺼이 바친 고결한 목숨. 오! 사제여 그들의 영혼을 위해 고요히...

러시아의 국장 쌍두 독수리. 유럽과 아시아. 서와 동. 두 패러다임의 접점 이르쿠츠크에서 재건된 제정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입상을 보며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가 생각났습니다. 볼세비키 사회주의 혁명으로 붕괴된 봉건체제. 그렇게 민중들에게 새벽이 왔는데 다시 어둠이 내리는 앙가라 강에서 램프를 밝힙니다.

블라디보스톡의 혁명광장에 가면 볼세비키혁명 기념 조각물이 있습니다. 민중을 착취한 농노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 소련을 건국한 노동자 농민. 승리를 쟁취한 그들에게 레닌은 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도달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이었던가요? 민중의 재봉기로 소련이 붕괴하고, 꽃향기 따라온 눈먼 까마귀, 그때를 먼 옛날의 신화처럼 회상합니다.

블라디보스톡 역 앞 광장엔 한손을 치켜든 레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레닌은 마르크스 주의에 의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키고 국제 공산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코민테른을 창설했지요. 민주주의냐 독재냐, 아래로부터의 볼세비키냐 위로부터의 볼세비키냐? 개인 자유와 집단 평등의 딜레마에 빠진 공산주의 이념. 평화공동체는 신기루 인가요?

“폐하! 저희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정의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 당신께 갑니다. 저희는 가난 속에 억눌리고 힘든 노동 속에 모욕 당하면서도 비참한 운명을 묵묵히 참아내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희의 인내는 고갈됐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저희는 일을 멈추고 고용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만이라도 보장 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구는 거절 됐습니다.”

‘시베리안 랩소디’는 시베리안의 영(靈)들에 관한 이미지의 시리즈 입니다. 그중 여러 곳에서 영이 까마귀로 표현됩니다. ‘구현몽’의 삼족오는 한민족의 얼로, ‘라즈돌로예 1937’ 에서는 고려인의 혼으로, ‘샤먼의 춤’ 에서는 신의 사자로, ‘유토피아의 꽃,’ 에서는 러시아 민중의 혼으로, ‘허무주의자’ 에서는 혁명가의 혼으로, ‘딜레마’ 에서는 이념의 혼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있습니다. 개방하지 않던 군항에 이제는 외국 관광객의 출입이 자유롭습니다. 길에서 만난 러시아 해군 수병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요? 동쪽을 정복한다는 뜻을 지닌 블라디보스톡. 팍스러시아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병이여, 부디 갈매기의 꿈을 꾸어라. 높이 날아 올라, 멀리 보아라. 새로운 세상이 보이리라.
Siberian Rhapsody
시베리안랩소디